양반 종가 기제사 제사상
명재 윤증 종가 제사상
"엄정하고 간소하게 지내라" 제사상은 간소하게 줄여
퇴계 이황 종가 불천위 제사상
해남 윤씨 고산 윤선도 종가 불천위 제사상
수입 과일인 바나나가 있다.
과일의 종류에는 제한이 없다고 한다.
안동 하회마을 불천위 제사상
핵심은 중앙에 올린 생고기
안동 종가 시제사상
고산 윤선도 선생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
서계 박세당선생 종가 불천위 제사상
서애 류성룡 선생 종가 불천위 제사상
안동 학봉 김성일 종가 불천위 제사상
요약 정리
차례는 제사와 다르게 설날 추석에 지내는데 간소하게 올린다.
추석에는 본래 차례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 유교에서는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이다.
안동지역 종가 대부분 추석 차례를 안 지낸다.
제사상에는 본래 전을 올리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기름쓰는 음식은 올리지 않는다. 전을 올리는 것은 불교식이다.
예법을 중시하는 가문에서는 남성이 음식 준비를 했다.
종가에서 제사를 지낼때 고기도 생고기 쓰고 절대 튀김 같은걸 하지 않는다고.
전도 안하고 큰 상을 치뤄야 할 일이 있다면 사람을 쓴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뿐인 것이다." 라고 율곡이이가 이야기 했죠.
돈으로 산 가짜 양반들에 의해서 제사상과 차례상이 어마어마해 진거죠.
참고로
"'주자가례' 이전의 예서인 '예기'에도 ‘가장 숭상하는 제사에는 ‘(피)냄새’로 제를 올린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덧붙였다.
'혈식군자(血食君子)'란 말도 있다. 그래서 대(大)유학자들을 모신 서원에서 지내는 제사는 특히 이 원칙에 철저하다고 한다.
불천위제는 그 집안에서 가장 존경하는 조상을 모시는 것인 만큼 날고기를 올리는 전통을 유지한다. 요즘엔 제례 후 함께 음복하기 위해 익혀 올리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특히 안동지역에서는 지금도 날고기를 사용한다.
날고기를 올릴 때도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방에서는 어적·육적·계적을 따로 올리지 않고 한꺼번에 쌓아올린다.
이를 '도적'이라고 한다.
'주자가례'에는 '삼적'을 따로 내도록 제시돼 있는데,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한 틀에 한꺼번에 높이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퇴계 이황 17대 종손의 말 "추석에는 원래 차례를 지내는것이 아니다"
유교에서는 원래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 양반 족보를 사고 팔고 양반 집안 세탁 경쟁을 한 결과 화려한 차례 제사상이 되었다.
유교에서는 제사상에 기름진 전 같은 음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예법에 어긋난다.
전 같은 기름진 음식을 올리는 건 불교에서 온 것이다. 불교 공양 풍습이 유교와 이상하게 합쳐진 것이다.
'우리 집안은 원래 노비 출신인데 돈 주고 양반을 샀다'의 인증.
1. 전을 제사상에 올린다 - 원래 유교 제사상엔 기름진 음식이 안 올라간다. 전은 불교 사찰 음식이다
2. 조율이시, 홍동백서 등을 고집한다 - 노비도 모자라 일본 전통을 조상님 앞에서 고집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 종가의 다례상에는 멜론이 오른다.
고산 윤선도 종가는 제사상에 바나나뿐 아니라 오렌지도 올린다. 불천위(不遷位·4대가 지났어도 자손 대대로 기제사를 모실 수 있게 국가나 유림에서 인정한 조상) 제사임에도 그렇다.
이상하거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멜론이든 망고든 조상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퇴계 종택 17대 주손(胄孫 장손)인 이치억씨도 “제철 과일을 조상께 정성껏 바치는 것이 제사이기 때문에 멜론이든 망고든 음식의 종류를 가릴 바는 아니다”고 말했다.
멜론 바나나 오렌지가 이상하다면 15~16세기에 들어온 토마토나 17세기 이전에 들어온 수박이 제사상에 오르는 것도 법도에 어긋난 일이다.
옛날 제사에는 여자가 제사 음식 안한다는 집은 여자는 부정타서 제사음식 만들지 말라는 이유에서에요. 여자를 아껴서가 아니라. 그래서 잘난 남자들만 손댄 음식 제상에 올리는 거죠. 제상 안올리고 먹는 음식은 여자들이 만들걸요.
전통 제사상에 생고기가 올라가는 이유
제사상으로 조상신을 모시는 강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계전서에 기록된 가례집람 제례의 '사시제'에 따르면,
'제사 지낼적에 피와 생고기를 쓴 것은 그 생기를 빌리고자 해서일뿐이다... 옛날에는 거북에게 피를 바르면서 희생의 피를 썼었는데... 이 생기를 가지고 신에게 접하게 한것이다... 라는 '주자어류'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피나 생고기를 이용한 강신으로 시작하는 제사를 '혈사(血祀)'라 하는데
종묘제례나 사직, 오악에 지내는 제사는 모두 제사현장에 있는 희생단에서 바로 희생을 잡아 날것을 올리는 혈사입니다.
상당히 원시적이고 미신적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이 혈사를 강조한 것은 오히려 유교경전인 '예경'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라 하며, 그 귀신은 반드시 번소하는 즈음에 내려와 그제사를 흠향하게 된다.
혈사가 없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이규보의 주장이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습니다.
귀신은 희생의 생기를 빌려 강림하게 되는데, 귀신이 생기를 빌릴 수 있는 희생이 없으면 강신할 수 없고,
결국 귀신이 제사를 흠향할 수 없으니 그 제사는 아니지낸만 못하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날것을 사용한 제사는 조선초기 사대부가에서도 행해졌고,
이이선생또한 희생은 날것으로 써야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나,
송시열은 굳이 날것을 쓸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후대로 올수록 희생의 의미가 쇠퇴하여 일반 가정의 제례에선 날것을 쓰는 풍습은 점차 사라졌으나
혈사의 개념을 중시했던 국가제사에는 여전히 희생을 바쳤고,
오늘날 종묘제례에서도 희생으로 날것을 올립니다.
희생은 혈제를 올린 후에 희생단 동쪽에 위치한 솥에서 삶아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혈식이라 합니다.
조선후기 성균관 유생으로 반중잡영을 쓴 윤기는 대성전 문묘대제이후 유생들에게 나눠준
이 고기의 양이 너무도 작다는 불만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전통제사의 유래
재미있게도, 유명한 유학자를 조상으로 모신 유서깊은 가문들은 제각각 이유를 들어 독특한 방식으로 넣고 빼가며 자기들만의 상차림을 정해 전통으로 내려오지만, 그렇지 않은 집들은 상차림에 대해 딱히 정해진 바가 없으니 오히려 형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율곡 이이의 제사상에는 소고기가 올라가지 않는데, 이는 율곡 이이가 평생 동안 소고기엔 입도 안댔으며 이를 생전에 제사에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즉 생전 본인의 의사 표명이 있었다면 형식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
따라서 보통 제사상 하면 떠올리는 상차림 대신 바나나, 피자, 치킨 등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고인이 생전에 아주 싫어했던 음식은 빼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서 "밤, 대추, 곶감, 약과 등과 같은 전통 상차림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이라면 올려도 상관 없다"는 2가지 의견이 충돌되고 있으나 무조건 형식만 지키는 것은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맞는 예법이 아니다.
전문가 견해도 "주식인 밥, 탕, 나물 등은 반드시 올려야 하지만 그 밖엔 피자나 치킨이나 바나나, 파인애플 같은 외래음식을 올려도 무방하다"는 의견이다.#. 가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패스트푸드나 서양식 과자 등으로 차린 제사상의 사진들이 올라오기도 하는데, 형편과 사정에 따라선 이 역시 제사 형식에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혹은 어떤 집들의 경우 그냥 아예 제사상 차리는 사람들이 차리기 편하고 먹고싶은거 위주로[2] 제사상을 차리고 원래 제사상에 기본으로 올라가는 음식은 한두 가지 정도[보통 마련하기 쉽고 손질도 덜 드는 과일류 등]만 올려두고 지내는 경우도 있다. 구색맞추기용 상차림용 반찬들도 직접 마련하기보단 그냥 사서 올리는 경우까지 있다. 요새는 아예 제사상을 대신 차려주는 업체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말 다했다.
특히 핵가족으로써 그냥 안 내려가고 따로 자기들끼리만 제사 지내는 집에선 이렇게 상차림 음식 선택의 자유도가 매우 높아진다. 또 가족 구성원들이 좀 깨어있는 집안이라면 그냥 모두 나서서 간소하게 음식을 각자 마련해와서 차리거나 아예 상차림 자체를 하지 말고 넘어가자고 하기도 한다.
본래 우리가 '전통' 상차림이라 부르는 형식도 1969년 3월 1일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공포된 건전가정의례준칙과 80~90년대 언론 등에서 몇몇 가문의 제사상 차림을 종합하여 상차림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널리 퍼뜨린 표준 형식일 뿐, 한국의 전통 상차림이라 보긴 힘들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가정의례준칙이 의도한 것은, 허례허식을 피하라고 국가에서 생활 수준을 고려하여 과도한 지출을 줄이고자 핑곗거리를 만들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더 성대하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러지 말라고, 집안 어르신들에게 "나라에서 하지 말랬어요"하고 이유를 댈 수 있게 한 거라는 이야기. 심지어 이 가정의례준칙에서는 제사의 대상은 2대조까지만 한정하며 제사의 수를 최대한 줄이고자 권장하였다.
본래 유교에선 처음부터 제사 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엄격한 상차림을 처음부터 지정하지 않았다. 이는 대학자를 배출한 집안의 불천위 제사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홍동백서나 조율이시 등의 규칙과는 애초에 거리가 먼 제사상이다.[퇴계 이황의 불천위 기제사 상을 보면 제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가 아는 진설법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송자대전>에서도 송시열이 "(중국 기준으로) 바다가 동쪽이니 생선이 동쪽인가"라는 식으로 지나가듯이 언급한 게 고작이다. 다시 말해 지금과 같은 형식적으로 굳어진 상차림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문 단위로 전해지는 상차림 규칙은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 내려오고 있다.
즉 우리가 아는 제사상의 상차림 형식은 성리학의 예법이 평민에게까지 퍼지기 시작하고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 말엽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제사 지내는 집들은 상술되었듯 유교 경전에 비춰보면 근거는 없지만 흔히 '정석'이라고 알려진 상차림을 고집하고 있고, 이를 차리기 위한 비용은 여전히 부담이 되는 규모이다. 물론 대가족이 대부분이라 수십 명의 제사상을 차려야하는 1980년대 이전에 비해 만들어야 하는 음식의 양이 조금 줄어들어 노동강도가 줄었다곤 하지만, 핵가족 기준으로 놓고 보면 여전히 음식의 양은 차고 넘친다.
1980년대만 해도 명절만 되면 모든 여자들이 분주하게 모여서 정신 없이 음식을 장만하는 노동환경에서 지금은 꽤 줄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제사상은 무시할 만한 노동은 아니다. 다만 가짓수가 많아도 양을 줄이면 그만인데 안 그러는 집이 많다. 양을 줄이는 것은 제사음식이 남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같은 비용으로 더 좋은 재료를 써서 더 맛있게 먹을 방법이기도 하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리려는 욕심만 자제하면 말이다. 다만 제사상은 조상에게 올린다는 이유로 먹지 않고 버릴지언정, 쓸 데 없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가득 올리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현실성 없는 비판이다.
https://jongga.koreastudy.or.kr/
한국국학진흥원 종가제례음식 아카이브
종가 제사상 한눈에 보는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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