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6.4 민주화 항쟁
1989년 4월 15일에 시작되어 6월 4일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 유혈 진압된 중국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
일반적으로 천안문 사태라고 말하면 이 항쟁을 말한다. 인민해방군과 시위대의 충돌로 최소 500명이 사망하였다. 공식적인 표기는 주로 천안문 사태이지만 이는 민주화 운동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쓰인다는 비판이 있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를 중국 공산당이 중국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반중 인사들은 이 사건을 '중국의 피의 일요일' 혹은 '베이징 대학살(Beijing Massacre)'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한국의 5.18 민주화운동 등에 빗대어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나 '1989년 톈안먼 광장 항쟁(Tiananmen Square Protest of 1989)'이라고 부른다. 또 1976년의 1차 사태와 구분하는 뜻으로 '2차 천안문 사태'라는 명칭도 제법 알려져 있다. 중국 당국 측에서는 '반혁명폭란'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바꿔서 '1980년대 말 춘하계 정치풍파'라 부르지만 애초에 언급 자체를 안 하고 하더라도 중국 내 언론에는 실리지 않는다.
중국 관변학자들은 '톈안먼 광장 사건(Tiananmen Square Incident)'이나 '6.4 사태(June Fourth Incident)'라는 용어를 쓴다.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할 때엔 '1989년 반정부정치폭란', '1989년 정치풍파'라고도 한다. 또는 '1989년 춘하지계 정치풍파'라고 순화하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중화권에서는 유혈 진압이 일어난 6월 4일에서 따와서 류쓰(六四), 육사사건(六四事件)이라고 부른다. 중국 인터넷에서는 六四를 그대로 썼다가는 바로 검열을 받아서 그런지 "5월 35일" 정도로 부르는 모양이다.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주도했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각계각층의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다. 그들 중에는 상인, 노동자, 언론인, 의사, 대학 교수, 심지어는 공안, 법조인, 공무원도 있었으며 적게는 9살짜리 아이에서 많게는 백발의 노인까지 참여한 범대중적 평화 시위였다. 거기다 1980년대 말 세계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동구권에 불기 시작한 자유화·민주화의 물결로 넘실대던 시기였고, 천안문 항쟁의 소식이 전 세계 언론으로 보도되자 미국, 유럽은 물론 개방화가 진행되던 소련 매체들에서도 이 시위를 지지했다.
따라서 학생 지도부, 베이징 시민, 그 누구도 인민해방군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부분 진압봉과 최루탄 정도를 사용한 강제해산 정도로 끝나고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본 것이다. 실제 학생 지도부 중 "천안문 광장이 피로 얼룩져야만 민중들이 각성할 것이다."라고 끝까지 저항을 계속한 강경파 차이링도 훗날 "기껏해야 강제해산일 줄 알았다."라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인민을 진짜 총칼과 전차로 깔아 뭉개버렸다. 당시 덩샤오핑은 텔레비전 등에 나와 이들을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면서 확고한 진압을 주장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확고한 의지였나 아니면 보수파의 위협적인 부상을 무마하려는 것이었나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으나 결론적으로 덩샤오핑은 이 사건에 대한 평가를 이후에도 뒤집지 않았다. 특히 인민을 해방한다는 군대가 일당독재와 부정부패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던 인민을 짓밟았다는 점은 큰 충격이자 아이러니였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현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그리고 1980년대 말 세계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자 중국 민주주의 역사에 주요한 이정표로 남게 된 미완의 가능성으로 평가받는다. 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반체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 투쟁과 시위 와중에 락 페스티벌을 방불케 할 만큼의 자유와 창발이 구현되었다는 점, 당시 각 세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격화로 인해 조성된 정국하에 촉발되었다는 점 등에서 68운동과 교집합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중국은 한국과 같이 민주화를 하여 현재의 중국보다도 훨씬 발전하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게다가 이 운동의 실패로 중국 내의 여러 교수들과 학생들, 유학파 출신의 사람들이 잡혀들어가 고문 후 투옥당하거나 사형까지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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